사라진 성곽길을 따라 걷기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덕수궁까지 이어지는 이 구간은 한양도성 내 5대 궁궐 중 두 곳을 돌아볼 수 있는 코스로, 거리가 온통 노란 은행잎으로 물들 때 걷는 것이 제 맛이다. 서울시립미술관에 이러 퇴계 이황 선생의 집터를 들르는 것도 잊지 말자.

출처:이야기를 따라 한양 도성을 걷다.

사라진 성곽길을 따라 걷기 대표사진

사라진 성곽길을 따라 걷기

사라진 성곽길을 따라 걷기 정보

📌주소 : 정보 없음


🌍홈페이지 : 정보 없음


😀안내 : 정보 없음


🏁소요거리 : 2.89km


😎일정 : 기타


🕗소요시간 : 3시간


🌎여행테마 : —-지자체—–


사라진 성곽길을 따라 걷기 여행코스 안내

코스1 : 광화문광장

서울_종로_광화문05

2009년 8월 1일, 새로운 모습으로 단장하여 시민들에게 개방된 광화문 광장은 600년 역사를 지닌 서울의 중심거리 세종로를 차량 중심의 거리에서 인간 중심의 공간으로 전환하고, 경복궁과 북악산 등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조망할 수 있는 공간으로 새롭게 조성하여, 세종로의 옛 모습인 육조거리 복원을 통한 역사·문화 체험 공간으로 재탄생되었다.
, 사적 제271호인 경희궁은 조선을 개국한 태조 이성계가 살았던 곳으로, 새문안 대궐 또는 서쪽의 궁궐이라 해서 서궐이라 불리기도 했다. 그 후 왕족의 사저로 쓰이다가 광해군 8년(1616)에 이 새문안 대궐 자리에 왕기(王氣)가 있어 이를 눌러 없애기 위해 별궁을 짓고 경덕궁이라 하였으나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은 축출되었으며 영조 36년(1760)에는 궁의 이름을 경희궁이라 개칭하였다.
, <서울시립미술관 경희궁분관>은 서울시립미술관 분관으로 2003년 7월에 개관하였다. 경희궁 옛터에 위치한 서울정도 600년 기념관을 전시공간으로 단장하여 넓은 뜰과 사적지가 어우러진 공간 속에서 많은 미술단체들의 다양한 전시가 열린다.
지상 2층의 규모로 2개의 전시실, 사무실 공간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유동적이며 다이나믹한 느낌을 주는 굴곡진 내부구조와 원형식의 복도 등 독특한 전시공간이 돋보인다. 특히 경희궁분관은 대관전시 위주로 운영된다.
, 한우 사골을 15시간 끓여낸 진한 국물이 특징이다. 끓이는 동안 수십 번 기름을 건져내는 정성이 보태져 깔끔한 국물맛을 더한다. 만두국도 일반 음식점과는 다르게 같은 사골 국물을 사용해 역시 깊은 국물맛을 볼 수 있다. 만두는 매장에서 매일 직접 빚으며 보들보들한 만두피와 퍽퍽하지 않은 부드러운 속살이 맛나다.
정동갤러리, 정동극장, 서울시립미술관까지 문화예술 지역에 위치하고 있어 여기저기 문화공간을 둘러보다 부담 없이 음식을 나누기 좋은 집이다.
, 서울특별시 종로구 평동에 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주석이었던 백범 김구가 1945년 11월 중국에서 돌아온 이후 1949년 6월 26일 암살당할 때까지 집무실과 숙소로 사용하였던 역사적 장소이다. 이승만의 이화장(梨花莊),김규식의 삼청장(三淸莊)과 함께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전에 건국 활동의 중심을 이룬 3대 요람이다. 1938년 금광으로 돈을 번 최창학(崔昌學)이 1,584평의 대지에 연건평 265평(지하1층, 지상2층)규모로 지은 일본식 건물로, 원래 이름은 죽첨장(竹添莊)이었다.8·15광복 이후 최창학이 김구의 거처로 제공하였으며, 김구가 죽첨장이라는 일본식 이름 대신 근처에 있는 다리 이름을 따서 경교장으로 개명하였다. 1968년 고려병원(현 강북삼성병원)이 인수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 사적 제124호의 덕수궁은 본디 왕궁이 아니었다. 원래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1454∼1488)의 집이었으나, 1592년 임진왜란 때 왕궁이 모두 불타서 1593년 행궁으로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선조임금은 의주로 피난 갔다가 한양으로 환도한 뒤 덕수궁에서 머무른다. 선조의 뒤를 이은 광해군은 1608년 이곳 행궁에서 즉위한 후 1611년 행궁을 경운궁이라 고쳐 부르고 7년 동안 왕궁으로 사용하다가 1615년에 창덕궁으로 옮기면서 이곳에는 선왕인 선조의 계비인 인목 대비만을 유폐시켰다. 1618년에는 인목대비의 존호를 폐지하고, 경운궁을 서궁이라 낮추어 부르기도 하였다.

코스2 : 경희궁

경희궁지

2009년 8월 1일, 새로운 모습으로 단장하여 시민들에게 개방된 광화문 광장은 600년 역사를 지닌 서울의 중심거리 세종로를 차량 중심의 거리에서 인간 중심의 공간으로 전환하고, 경복궁과 북악산 등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조망할 수 있는 공간으로 새롭게 조성하여, 세종로의 옛 모습인 육조거리 복원을 통한 역사·문화 체험 공간으로 재탄생되었다.
, 사적 제271호인 경희궁은 조선을 개국한 태조 이성계가 살았던 곳으로, 새문안 대궐 또는 서쪽의 궁궐이라 해서 서궐이라 불리기도 했다. 그 후 왕족의 사저로 쓰이다가 광해군 8년(1616)에 이 새문안 대궐 자리에 왕기(王氣)가 있어 이를 눌러 없애기 위해 별궁을 짓고 경덕궁이라 하였으나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은 축출되었으며 영조 36년(1760)에는 궁의 이름을 경희궁이라 개칭하였다.
, <서울시립미술관 경희궁분관>은 서울시립미술관 분관으로 2003년 7월에 개관하였다. 경희궁 옛터에 위치한 서울정도 600년 기념관을 전시공간으로 단장하여 넓은 뜰과 사적지가 어우러진 공간 속에서 많은 미술단체들의 다양한 전시가 열린다.
지상 2층의 규모로 2개의 전시실, 사무실 공간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유동적이며 다이나믹한 느낌을 주는 굴곡진 내부구조와 원형식의 복도 등 독특한 전시공간이 돋보인다. 특히 경희궁분관은 대관전시 위주로 운영된다.
, 한우 사골을 15시간 끓여낸 진한 국물이 특징이다. 끓이는 동안 수십 번 기름을 건져내는 정성이 보태져 깔끔한 국물맛을 더한다. 만두국도 일반 음식점과는 다르게 같은 사골 국물을 사용해 역시 깊은 국물맛을 볼 수 있다. 만두는 매장에서 매일 직접 빚으며 보들보들한 만두피와 퍽퍽하지 않은 부드러운 속살이 맛나다.
정동갤러리, 정동극장, 서울시립미술관까지 문화예술 지역에 위치하고 있어 여기저기 문화공간을 둘러보다 부담 없이 음식을 나누기 좋은 집이다.
, 서울특별시 종로구 평동에 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주석이었던 백범 김구가 1945년 11월 중국에서 돌아온 이후 1949년 6월 26일 암살당할 때까지 집무실과 숙소로 사용하였던 역사적 장소이다. 이승만의 이화장(梨花莊),김규식의 삼청장(三淸莊)과 함께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전에 건국 활동의 중심을 이룬 3대 요람이다. 1938년 금광으로 돈을 번 최창학(崔昌學)이 1,584평의 대지에 연건평 265평(지하1층, 지상2층)규모로 지은 일본식 건물로, 원래 이름은 죽첨장(竹添莊)이었다.8·15광복 이후 최창학이 김구의 거처로 제공하였으며, 김구가 죽첨장이라는 일본식 이름 대신 근처에 있는 다리 이름을 따서 경교장으로 개명하였다. 1968년 고려병원(현 강북삼성병원)이 인수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 사적 제124호의 덕수궁은 본디 왕궁이 아니었다. 원래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1454∼1488)의 집이었으나, 1592년 임진왜란 때 왕궁이 모두 불타서 1593년 행궁으로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선조임금은 의주로 피난 갔다가 한양으로 환도한 뒤 덕수궁에서 머무른다. 선조의 뒤를 이은 광해군은 1608년 이곳 행궁에서 즉위한 후 1611년 행궁을 경운궁이라 고쳐 부르고 7년 동안 왕궁으로 사용하다가 1615년에 창덕궁으로 옮기면서 이곳에는 선왕인 선조의 계비인 인목 대비만을 유폐시켰다. 1618년에는 인목대비의 존호를 폐지하고, 경운궁을 서궁이라 낮추어 부르기도 하였다.

코스3 : 서울시립미술관(서소문본관)

서울시립미술관_02

2009년 8월 1일, 새로운 모습으로 단장하여 시민들에게 개방된 광화문 광장은 600년 역사를 지닌 서울의 중심거리 세종로를 차량 중심의 거리에서 인간 중심의 공간으로 전환하고, 경복궁과 북악산 등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조망할 수 있는 공간으로 새롭게 조성하여, 세종로의 옛 모습인 육조거리 복원을 통한 역사·문화 체험 공간으로 재탄생되었다.
, 사적 제271호인 경희궁은 조선을 개국한 태조 이성계가 살았던 곳으로, 새문안 대궐 또는 서쪽의 궁궐이라 해서 서궐이라 불리기도 했다. 그 후 왕족의 사저로 쓰이다가 광해군 8년(1616)에 이 새문안 대궐 자리에 왕기(王氣)가 있어 이를 눌러 없애기 위해 별궁을 짓고 경덕궁이라 하였으나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은 축출되었으며 영조 36년(1760)에는 궁의 이름을 경희궁이라 개칭하였다.
, <서울시립미술관 경희궁분관>은 서울시립미술관 분관으로 2003년 7월에 개관하였다. 경희궁 옛터에 위치한 서울정도 600년 기념관을 전시공간으로 단장하여 넓은 뜰과 사적지가 어우러진 공간 속에서 많은 미술단체들의 다양한 전시가 열린다.
지상 2층의 규모로 2개의 전시실, 사무실 공간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유동적이며 다이나믹한 느낌을 주는 굴곡진 내부구조와 원형식의 복도 등 독특한 전시공간이 돋보인다. 특히 경희궁분관은 대관전시 위주로 운영된다.
, 한우 사골을 15시간 끓여낸 진한 국물이 특징이다. 끓이는 동안 수십 번 기름을 건져내는 정성이 보태져 깔끔한 국물맛을 더한다. 만두국도 일반 음식점과는 다르게 같은 사골 국물을 사용해 역시 깊은 국물맛을 볼 수 있다. 만두는 매장에서 매일 직접 빚으며 보들보들한 만두피와 퍽퍽하지 않은 부드러운 속살이 맛나다.
정동갤러리, 정동극장, 서울시립미술관까지 문화예술 지역에 위치하고 있어 여기저기 문화공간을 둘러보다 부담 없이 음식을 나누기 좋은 집이다.
, 서울특별시 종로구 평동에 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주석이었던 백범 김구가 1945년 11월 중국에서 돌아온 이후 1949년 6월 26일 암살당할 때까지 집무실과 숙소로 사용하였던 역사적 장소이다. 이승만의 이화장(梨花莊),김규식의 삼청장(三淸莊)과 함께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전에 건국 활동의 중심을 이룬 3대 요람이다. 1938년 금광으로 돈을 번 최창학(崔昌學)이 1,584평의 대지에 연건평 265평(지하1층, 지상2층)규모로 지은 일본식 건물로, 원래 이름은 죽첨장(竹添莊)이었다.8·15광복 이후 최창학이 김구의 거처로 제공하였으며, 김구가 죽첨장이라는 일본식 이름 대신 근처에 있는 다리 이름을 따서 경교장으로 개명하였다. 1968년 고려병원(현 강북삼성병원)이 인수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 사적 제124호의 덕수궁은 본디 왕궁이 아니었다. 원래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1454∼1488)의 집이었으나, 1592년 임진왜란 때 왕궁이 모두 불타서 1593년 행궁으로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선조임금은 의주로 피난 갔다가 한양으로 환도한 뒤 덕수궁에서 머무른다. 선조의 뒤를 이은 광해군은 1608년 이곳 행궁에서 즉위한 후 1611년 행궁을 경운궁이라 고쳐 부르고 7년 동안 왕궁으로 사용하다가 1615년에 창덕궁으로 옮기면서 이곳에는 선왕인 선조의 계비인 인목 대비만을 유폐시켰다. 1618년에는 인목대비의 존호를 폐지하고, 경운궁을 서궁이라 낮추어 부르기도 하였다.

코스4 : 점심식사(정동국시)

서울_종로구_정동국시_메뉴1_칼국수_1

2009년 8월 1일, 새로운 모습으로 단장하여 시민들에게 개방된 광화문 광장은 600년 역사를 지닌 서울의 중심거리 세종로를 차량 중심의 거리에서 인간 중심의 공간으로 전환하고, 경복궁과 북악산 등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조망할 수 있는 공간으로 새롭게 조성하여, 세종로의 옛 모습인 육조거리 복원을 통한 역사·문화 체험 공간으로 재탄생되었다.
, 사적 제271호인 경희궁은 조선을 개국한 태조 이성계가 살았던 곳으로, 새문안 대궐 또는 서쪽의 궁궐이라 해서 서궐이라 불리기도 했다. 그 후 왕족의 사저로 쓰이다가 광해군 8년(1616)에 이 새문안 대궐 자리에 왕기(王氣)가 있어 이를 눌러 없애기 위해 별궁을 짓고 경덕궁이라 하였으나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은 축출되었으며 영조 36년(1760)에는 궁의 이름을 경희궁이라 개칭하였다.
, <서울시립미술관 경희궁분관>은 서울시립미술관 분관으로 2003년 7월에 개관하였다. 경희궁 옛터에 위치한 서울정도 600년 기념관을 전시공간으로 단장하여 넓은 뜰과 사적지가 어우러진 공간 속에서 많은 미술단체들의 다양한 전시가 열린다.
지상 2층의 규모로 2개의 전시실, 사무실 공간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유동적이며 다이나믹한 느낌을 주는 굴곡진 내부구조와 원형식의 복도 등 독특한 전시공간이 돋보인다. 특히 경희궁분관은 대관전시 위주로 운영된다.
, 한우 사골을 15시간 끓여낸 진한 국물이 특징이다. 끓이는 동안 수십 번 기름을 건져내는 정성이 보태져 깔끔한 국물맛을 더한다. 만두국도 일반 음식점과는 다르게 같은 사골 국물을 사용해 역시 깊은 국물맛을 볼 수 있다. 만두는 매장에서 매일 직접 빚으며 보들보들한 만두피와 퍽퍽하지 않은 부드러운 속살이 맛나다.
정동갤러리, 정동극장, 서울시립미술관까지 문화예술 지역에 위치하고 있어 여기저기 문화공간을 둘러보다 부담 없이 음식을 나누기 좋은 집이다.
, 서울특별시 종로구 평동에 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주석이었던 백범 김구가 1945년 11월 중국에서 돌아온 이후 1949년 6월 26일 암살당할 때까지 집무실과 숙소로 사용하였던 역사적 장소이다. 이승만의 이화장(梨花莊),김규식의 삼청장(三淸莊)과 함께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전에 건국 활동의 중심을 이룬 3대 요람이다. 1938년 금광으로 돈을 번 최창학(崔昌學)이 1,584평의 대지에 연건평 265평(지하1층, 지상2층)규모로 지은 일본식 건물로, 원래 이름은 죽첨장(竹添莊)이었다.8·15광복 이후 최창학이 김구의 거처로 제공하였으며, 김구가 죽첨장이라는 일본식 이름 대신 근처에 있는 다리 이름을 따서 경교장으로 개명하였다. 1968년 고려병원(현 강북삼성병원)이 인수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 사적 제124호의 덕수궁은 본디 왕궁이 아니었다. 원래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1454∼1488)의 집이었으나, 1592년 임진왜란 때 왕궁이 모두 불타서 1593년 행궁으로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선조임금은 의주로 피난 갔다가 한양으로 환도한 뒤 덕수궁에서 머무른다. 선조의 뒤를 이은 광해군은 1608년 이곳 행궁에서 즉위한 후 1611년 행궁을 경운궁이라 고쳐 부르고 7년 동안 왕궁으로 사용하다가 1615년에 창덕궁으로 옮기면서 이곳에는 선왕인 선조의 계비인 인목 대비만을 유폐시켰다. 1618년에는 인목대비의 존호를 폐지하고, 경운궁을 서궁이라 낮추어 부르기도 하였다.

코스5 : 서울 경교장

경교장

2009년 8월 1일, 새로운 모습으로 단장하여 시민들에게 개방된 광화문 광장은 600년 역사를 지닌 서울의 중심거리 세종로를 차량 중심의 거리에서 인간 중심의 공간으로 전환하고, 경복궁과 북악산 등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조망할 수 있는 공간으로 새롭게 조성하여, 세종로의 옛 모습인 육조거리 복원을 통한 역사·문화 체험 공간으로 재탄생되었다.
, 사적 제271호인 경희궁은 조선을 개국한 태조 이성계가 살았던 곳으로, 새문안 대궐 또는 서쪽의 궁궐이라 해서 서궐이라 불리기도 했다. 그 후 왕족의 사저로 쓰이다가 광해군 8년(1616)에 이 새문안 대궐 자리에 왕기(王氣)가 있어 이를 눌러 없애기 위해 별궁을 짓고 경덕궁이라 하였으나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은 축출되었으며 영조 36년(1760)에는 궁의 이름을 경희궁이라 개칭하였다.
, <서울시립미술관 경희궁분관>은 서울시립미술관 분관으로 2003년 7월에 개관하였다. 경희궁 옛터에 위치한 서울정도 600년 기념관을 전시공간으로 단장하여 넓은 뜰과 사적지가 어우러진 공간 속에서 많은 미술단체들의 다양한 전시가 열린다.
지상 2층의 규모로 2개의 전시실, 사무실 공간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유동적이며 다이나믹한 느낌을 주는 굴곡진 내부구조와 원형식의 복도 등 독특한 전시공간이 돋보인다. 특히 경희궁분관은 대관전시 위주로 운영된다.
, 한우 사골을 15시간 끓여낸 진한 국물이 특징이다. 끓이는 동안 수십 번 기름을 건져내는 정성이 보태져 깔끔한 국물맛을 더한다. 만두국도 일반 음식점과는 다르게 같은 사골 국물을 사용해 역시 깊은 국물맛을 볼 수 있다. 만두는 매장에서 매일 직접 빚으며 보들보들한 만두피와 퍽퍽하지 않은 부드러운 속살이 맛나다.
정동갤러리, 정동극장, 서울시립미술관까지 문화예술 지역에 위치하고 있어 여기저기 문화공간을 둘러보다 부담 없이 음식을 나누기 좋은 집이다.
, 서울특별시 종로구 평동에 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주석이었던 백범 김구가 1945년 11월 중국에서 돌아온 이후 1949년 6월 26일 암살당할 때까지 집무실과 숙소로 사용하였던 역사적 장소이다. 이승만의 이화장(梨花莊),김규식의 삼청장(三淸莊)과 함께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전에 건국 활동의 중심을 이룬 3대 요람이다. 1938년 금광으로 돈을 번 최창학(崔昌學)이 1,584평의 대지에 연건평 265평(지하1층, 지상2층)규모로 지은 일본식 건물로, 원래 이름은 죽첨장(竹添莊)이었다.8·15광복 이후 최창학이 김구의 거처로 제공하였으며, 김구가 죽첨장이라는 일본식 이름 대신 근처에 있는 다리 이름을 따서 경교장으로 개명하였다. 1968년 고려병원(현 강북삼성병원)이 인수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 사적 제124호의 덕수궁은 본디 왕궁이 아니었다. 원래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1454∼1488)의 집이었으나, 1592년 임진왜란 때 왕궁이 모두 불타서 1593년 행궁으로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선조임금은 의주로 피난 갔다가 한양으로 환도한 뒤 덕수궁에서 머무른다. 선조의 뒤를 이은 광해군은 1608년 이곳 행궁에서 즉위한 후 1611년 행궁을 경운궁이라 고쳐 부르고 7년 동안 왕궁으로 사용하다가 1615년에 창덕궁으로 옮기면서 이곳에는 선왕인 선조의 계비인 인목 대비만을 유폐시켰다. 1618년에는 인목대비의 존호를 폐지하고, 경운궁을 서궁이라 낮추어 부르기도 하였다.

코스6 : 덕수궁

서울_중구_덕수궁01

2009년 8월 1일, 새로운 모습으로 단장하여 시민들에게 개방된 광화문 광장은 600년 역사를 지닌 서울의 중심거리 세종로를 차량 중심의 거리에서 인간 중심의 공간으로 전환하고, 경복궁과 북악산 등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조망할 수 있는 공간으로 새롭게 조성하여, 세종로의 옛 모습인 육조거리 복원을 통한 역사·문화 체험 공간으로 재탄생되었다.
, 사적 제271호인 경희궁은 조선을 개국한 태조 이성계가 살았던 곳으로, 새문안 대궐 또는 서쪽의 궁궐이라 해서 서궐이라 불리기도 했다. 그 후 왕족의 사저로 쓰이다가 광해군 8년(1616)에 이 새문안 대궐 자리에 왕기(王氣)가 있어 이를 눌러 없애기 위해 별궁을 짓고 경덕궁이라 하였으나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은 축출되었으며 영조 36년(1760)에는 궁의 이름을 경희궁이라 개칭하였다.
, <서울시립미술관 경희궁분관>은 서울시립미술관 분관으로 2003년 7월에 개관하였다. 경희궁 옛터에 위치한 서울정도 600년 기념관을 전시공간으로 단장하여 넓은 뜰과 사적지가 어우러진 공간 속에서 많은 미술단체들의 다양한 전시가 열린다.
지상 2층의 규모로 2개의 전시실, 사무실 공간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유동적이며 다이나믹한 느낌을 주는 굴곡진 내부구조와 원형식의 복도 등 독특한 전시공간이 돋보인다. 특히 경희궁분관은 대관전시 위주로 운영된다.
, 한우 사골을 15시간 끓여낸 진한 국물이 특징이다. 끓이는 동안 수십 번 기름을 건져내는 정성이 보태져 깔끔한 국물맛을 더한다. 만두국도 일반 음식점과는 다르게 같은 사골 국물을 사용해 역시 깊은 국물맛을 볼 수 있다. 만두는 매장에서 매일 직접 빚으며 보들보들한 만두피와 퍽퍽하지 않은 부드러운 속살이 맛나다.
정동갤러리, 정동극장, 서울시립미술관까지 문화예술 지역에 위치하고 있어 여기저기 문화공간을 둘러보다 부담 없이 음식을 나누기 좋은 집이다.
, 서울특별시 종로구 평동에 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주석이었던 백범 김구가 1945년 11월 중국에서 돌아온 이후 1949년 6월 26일 암살당할 때까지 집무실과 숙소로 사용하였던 역사적 장소이다. 이승만의 이화장(梨花莊),김규식의 삼청장(三淸莊)과 함께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전에 건국 활동의 중심을 이룬 3대 요람이다. 1938년 금광으로 돈을 번 최창학(崔昌學)이 1,584평의 대지에 연건평 265평(지하1층, 지상2층)규모로 지은 일본식 건물로, 원래 이름은 죽첨장(竹添莊)이었다.8·15광복 이후 최창학이 김구의 거처로 제공하였으며, 김구가 죽첨장이라는 일본식 이름 대신 근처에 있는 다리 이름을 따서 경교장으로 개명하였다. 1968년 고려병원(현 강북삼성병원)이 인수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 사적 제124호의 덕수궁은 본디 왕궁이 아니었다. 원래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1454∼1488)의 집이었으나, 1592년 임진왜란 때 왕궁이 모두 불타서 1593년 행궁으로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선조임금은 의주로 피난 갔다가 한양으로 환도한 뒤 덕수궁에서 머무른다. 선조의 뒤를 이은 광해군은 1608년 이곳 행궁에서 즉위한 후 1611년 행궁을 경운궁이라 고쳐 부르고 7년 동안 왕궁으로 사용하다가 1615년에 창덕궁으로 옮기면서 이곳에는 선왕인 선조의 계비인 인목 대비만을 유폐시켰다. 1618년에는 인목대비의 존호를 폐지하고, 경운궁을 서궁이라 낮추어 부르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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